2019년
개인전 < 낯, face,sur-face > 의 서문 글들입니다.
목차
김남수 (안무비평)
인간적이지 않은 환상성의 경이, 얼굴의 특징들
김동규 (작가)
아픈 종이를 입은 인간
인간적이지 않은 환상성의 경이, 얼굴의 특징들
김남수(안무비평)
#1. “인간성의 부정적인 충동 전체가 인간적인 완전체, 하나의 형상, 하나이며 분리불가능한 형상 – 즉 < 얼굴 > -- 을 창조하기 위해 괴물 같은 비활성의 덩어리 속으로 튕겨 들어오는 것 같았다.” (들뢰즈)
#2. “그는 유리창에 희끄무레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황석영, < 손님 > 중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슬쩍 비쳐 들어온다. 어릴 때 심하게 역병을 앓았는지 얼굴에 얽은 자국이 콩멍석에 찧은 듯한 모습이다. 그 역병의 정체는 천연두였고, 흔히 ‘손님’이라고 불렸다. 실은 ‘손님’은 달갑지 않지만 왈패처럼 찾아온 불청객이었고, 그렇다고 그 손님을 야박하게 대하면 반드시 해꼬지를 한다는 속설이 믿어졌다. 고로 ‘손님굿’은 얼굴 가득 열꽃이 피어있는 환자를 괴롭히는 손님에게 융숭하게 대접하는 굿판이었고, 대접을 받으면 받을수록 손님은 욕심을 더 부렸다.
고현정 작가의 얼굴 그림은 손님이 찾아온 듯 얼굴 가득히 열꽃이 피어 있다. 열꽃은 불을 놓아 극단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궁이 불처럼 소담하게 은은한 것도 아닌 것이,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극단적으로 결합하는 형상처럼 도드라져 있다. 회화가 이토록 자기보존의 에고적 바운더리에서 이탈하여 쾌락원리 너머로 약동하는 본능의 힘을 현시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구나! 이것이 콩멍석에 찧어서 얽은 얼굴의 해학도 해학이지만, 그러한 사회적 차원의 광대스러움 이전에 삶과 죽음이 분기하는 고빗길 위에서 저 너머의 초월적인 높이가 아니라 다시 한번 저 아래로 내려와 지금 이곳의 내재적 깊이를 회화 표면에 드리우고 장치하고 있다는 것이 한번 더 놀라게 된다.
장지 위에 그려진 얼굴은 열꽃이 피어나는 역병 환자의 그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역병이란 정체를 가진 손님이 환자와 일체화되어 펼쳐지는 야력신[野力神]의 한바탕 춤이자 잔칫판이기도 하다. 야력신은 어느 길목에 숨어 있다가 과객을 이유없이 죽이는 못된 신격이지만, 태평양부터 유라시아 서쪽까지 이 신격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갑자기 초신적이고 초감각적인 권능을 발휘하는 트릭스터가 되기도 한다. 열꽃은 마치 목화솜처럼 담백하면서도 복사꽃처럼 화사한 빛을 띠어서 그 자체로 동아시아 전근대의 판타지 문법을 따르면 이계[異界]이자 헤테로토폴로지[Hetero-Topology], 즉 복숭아꽃잎 분분히 날리는 다른 세계이자 가능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 같다. 고현정 작가는 이 열꽃을 손의 따뜻한 마찰력으로 진흙을 이기듯 이겨낸 어떤 주름진 형상으로 누군가의 얼굴 빼곡히 범람하게 한다. 손 안 가득 함열[含熱], 즉 열을 머금은 기운의 수작업으로 열꽃을 오름처럼 피워낸, 그리하여 그 열꽃의 매트릭스에 의해 꽃 핀 나무의 괴로움처럼 역병 환자는 야력신의 뜻모를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 가득한 이 작은 분화구 같은 열꽃들이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암시하듯 하면서도 줄기차게 지금 여기의 방역된 세계가 아닌, 이미 자기 시대를 잃어버린 채 고의적인 시대착오를 범하여 지금 이곳에 당도한 손님-야력신의 힘자랑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널 ‘막만’이라고 해야겠다. 신이 막 만들어 놓은 꼴이란 뜻이야.” (< 묘진전 > 중에서)
소멸되기 이전의 역병 시간을 이곳으로 호출하여 달래라는 무고한 여성의 얼굴을 얽게 한 것은, 그리하여 그의 이름이 ‘막만’이 되도록 한 것은 저 뒤란에 있는 감나무가 저승에 한번 다녀와서 홍시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번 죽었다가 그 얽은 얼굴의 증오로써 다시 살아나 가해자를 응징하는, 그리하여 그 가해자 역시 내면 깊숙이 본래의 분노와 잃어버린 힘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매일매일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그것이 썩고 썩고 썩고 또 썩어 찐득거리고 새까만 덩어리가 되어가는 상응 관계가 나타난다.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덩어리는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고 녹는 흐름으로 스르르 풀려나간다. 즉 신의 장난처럼 막 만들어놓은 열꽃이 스스로의 힘자랑을 통해 사람들의 기우뚱거리면서 좌충우돌하고 삶과 죽음을 한줄로 꿰어 넘나드는 것이다. 이처럼 고현정 작가가 그린 얼굴 그림의 열꽃은 손님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소멸되기 이전의 역병 시간이 인간의 얼굴 곳곳에 오름처럼 어떻게 불기운의 질투, 열화, 선망, 파괴, 해학, 순수, 맑음을 질렀는가를 눈 앞에서 생생히 상기시킨다.
열꽃들 사이로 눈길은 무심하다. 무심하게 길며, 긴 눈꼬리로 열꽃의 마치 화산처럼 무엇인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뜨거움, 불편함과 나란하면서도 태연하다. 긴 눈은 암각화의 팽이얼굴에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려 벽화의 춤추는 노랫가락 신의 얼굴로부터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긴 눈은 고대적이며, 무엇인가 응시하지 않는 가운데 이녘을 쳐다보고 있다. 무심하고 태연한 것은 이미 형이상학적 시선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시선이다. 여기 잘못 당도한 눈, 열꽃들이 증식되듯 덩달아 길게 늘어나는 듯한 눈, 그 속에 시간의 화엄 질서를 다 담은 눈이다. 그런 눈이 초연하게 열꽃들을 거느리면서, 열꽃들의 야력신 같은 무자비한 준동과 행패 속에서 있다. 고현정 작가의 이 얼굴성은 굉장히 익숙한 민화풍의 이미지로부터 연상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초연한 수동적 받아들임의 스탠스가 낯설다. 죽은 자가 되돌아와서 보여주는 얼굴의 환상성이라고 할까. 혹은 피부 밑에 들끓어오르는 공장(아르토)이 폭발할 듯한 기세로 치닫는 초과현실성이라고 할까.
이 그림들은 모더니즘이 태초의 의고적인 것과 내밀한 계약을 해왔던 과정(랑시에르)과 관계가 없다. 모더니즘의 미학적이며 아이러니한 태도에는 현실 세계의 문제를 전위적으로 개입하는 전쟁의 상태, 자유로운 지적 인식적 유희를 위한 기회로 보는 정신의 상태가 있어서 현실에 대한 정치적 개입주의와 현실로부터 떨어져나온 자율적 미학주의가 메트로놈처럼 왔다갔다 해왔다. 그러나 1968년 5월 혁명은 여기에 정서적 차원의 손님굿 한바탕을 펼쳐놓으면서 아방가르드를 분쇄했고, 사실상 모더니즘의 머리를 왕의 단두대에 걸어서 잘라버렸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세계 경제 대공황은 이 잘린 머리가 다시 왕(=모더니즘)의 몸통에 붙지 못하게 재를 뿌렸다. 모더니즘의 종언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그 즈음, 상상력과 사랑의 공포, 기독교적 변증법의 끝은 같은 해 개봉한 영화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터뜨렸다. “시간을 바꾸려면, 여름의 첫날을 바꾸어야 한다.”
모더니즘의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 좀비라는 사건은 시간관이 바뀌지 않은 억척스런 서구적 옹고집에 대한 풍자이자 패러디였는데, 그럼 그러한 시간관을 바꿀 ‘여름의 첫날’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다른 문화권의 시간관을 대체하는 작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도입하는 그 어느 날일 것이다. 박생광의 그림, 천경자의 그림, 아마링고의 그림, 우타 우타 챵갈라의 그림이 현시하는 ‘죽음본능’과 그에 입각한 전혀 다른 시간관의 채용. 그런 선상에서 고현정 작가의 그림에는 ‘여름의 첫날’이 있다. “하얀 벽에 검은 구멍”(들뢰즈)이라고 명명한 혼돈[混沌]의 얼굴에 이목구비 뚫어주는 순간! 지상의 운명 같은 얼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읊조리는 얼굴, 무신경한 얼굴, 독재자의 얼굴, 세상물정 모르고 순수한 얼굴, 얼굴들이 갖는 얼굴성의 특징은 그 뚫어주는 순간 이전에는 시간들이 응축된 잠재성의 표정들로 가득한 가면 같은 것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진리는 가면의 진리”(와일드)라는 표현은 그 가면이 다양한 시간들을 집합시켜놓은 얼굴성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이제 70개의 얼굴 그림들을 찬찬히 보라. 고현정 작가의 이 가면의 진리 같은, 이미 다양체로서 모든 잠재성을 한몸에 듬뿍 함유하고 있는 그 ‘죽음본능’을 거쳐온 얼굴들, 그 얼굴성의 특징은 변주적이면서도 차이적이란 사실이다.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 귀 두 개라는 얼굴의 구성요소들은 열꽃의 경이로움, 양가적인 힘 때문인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세슘 분자 시계와는 유다른 시간의 표정들을 향해 구성되어 간다. 보는 자의 구성주의적 심상을 따라 이목구비는 다시 한번 영유아의 타고난 본능에 따른 얼굴성의 디폴트세팅에 거울처럼 비춰서 검토된다. 영유아도 잘생김과 못생김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주적이면서 차이적인 얼굴들은 단순히 그러한 미추 관념의 영유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돌 세개만 던져놓아도 얼굴로 보아내는 시각성의 영유아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미 얼굴의 구성요소들은 혼돈의 아무것도 없는 얼굴판의 상태와 “흰 벽의 검은 구멍”이라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주어진 인간의 얼굴을 이탈하려는 탈출속도, 탈영토화의 충동, 그러면서도 영유아 수준에서 다시 인간의 얼굴로 재인지되는 시각성이 한꺼번에 작동하면서 흩어져 나가면서 구성된다. 얼굴은 인간의 부정적인 충동을 뜻하는 열꽃들로 인해 파괴되고 망가지는 한에서만 거대한 미래를 암시한다. 이 거대한 미래는 아직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 동시에 전혀 다른 시간관의 풍경이다. ‘여름의 첫날’… 즉 인간의 얼굴이면서 인간의 얼굴이 아닌 한에서 ‘여름의 첫날’은 여기 도래하기 시작한다.
#3. “주홍색으로 그려지지 않은 빈 곳을 화약으로 문지르자 붉고 푸른 여러 색깔들이 나왔다. 그러고 나서 곪지 않도록 쏘시개나무로 상처 부위를 지졌다.” (존 롱)
잠에서 깨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유리창의 얼룩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이 슬쩍 비쳐 들어온다. 반사된 얼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안경의 얼룩을 통과해서 그 얼룩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얼룩을 통해서 얼룩을 보기 때문에 그 반사된 얼룩의 상에는 채도를 좀더 추가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그 추가분을 < 손님 >에서는 유리창과 TV 모니터에 비치는 어떤 형상들, 즉 망령들이라고 본다. 죽은 자의 얼굴, 그 환상성을 우리는 ‘손님’이라고 재명명할 수 있다. 그 옛날에는 맑시즘이라든가 기독교였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그러하다. 환상성은 어제 죽은 동료 미술작가의 빈소를 찾아가는 길목에 신호대기 중인 트럭운전수의 얼굴 위에서 짖궂게 출현하는 그 작가의 망령 같은 표정 같은 것이다. 고현정 작가의 얼굴 그림은 열꽃들의 질주를 통해서 이러한 환상성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손님’의 이름은 아직 미정 상태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열꽃들을 좀더 지진다면, 분명히 전근대의 유령적인 것들이든 현대의 은폐된 본능이든 혹은 아무것도 아님으로서의 투명한 매체성이 얼굴로부터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지지는 과정으로 고현정 작가는 장지에 뻥하고 구멍을 뚫었다. 이 구멍은 보통의 경우 뒤샹이나 폰타나처럼 그 해당 매체의 벌거벗은 실재계적 측면의 외설적 출현이 되겠지만, 고현정 작가에게는 그런 가면을 가리키면서 나아가는 얼굴의 환상성이라는 자기언어로 생각된다. 그는 관람하는 사람들 마음 각자가 그 내부의 얼룩을 통해서 거울을 보듯이, 그럼으로써 얼룩이 얼룩을 보면서 자기조율을 하도록 유도하듯이 이 환상성을 희게 또는 투명하게 놓아둔다. 어떤 구체적인 얼굴이면서도 그 자체로는 다른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차원의 영역이다. 이제 열꽃 피어나는 얼굴의 괴로움은 몸 전체로, 다른 동물로, 사물들로 번져나가면서 ‘여름의 첫날’을 예찬한다. 즉 랭보처럼 시간이 되니, 가슴이 뛰는구나. 고로 새로운 시간의 얼굴들, 몸체들이 출현하는 것을 기뻐하자. 기뻐하자.
The Wonder of Inhuman Fantasy, Characteristics of Faces
by Kim Nam-Soo (Choreography Critic)
#1. "It seemed that the whole negative impulse of humanity bounced into a monstrous inactive mass to create a human perfection, one image, one and inseparable image-the face." (Deleuze)
#2. “He gazed at the faint reflection of himself upon the window. It was the most unfamiliar face in the world.” (Hwang Suk-yong, “The Guest”)
Somebody’s face faintly shows through. The red spots on their face blistered, as if they’ve suffered a severe illness in their youth. The illness was smallpox, commonly called “the guest”. In truth, the “guest” was an unwelcome one, who still visited like a hooligan; however, it was believed that treating it inhospitably would bring definite harm. Therefore, the Shamanistic ritual for the guest was to coddle and to serve, and the guest would get greedier with every service.
The face drawn by artist Ko Hyun-Jung is covered in red spots. They’re not flaming up like intentional fires, nor gently burning like campfires; they splatter the face like a union between the instincts of life and death. Drawings can still reveal the power of instinct, which transcends the egotistical boundary of self-preservation to reach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I am surprised once more to find that the faces are not only humorous, but also representing the transcendence of the matter of life and death in a deeply internalized way.
The face, suffering from some major infectious disease, becomes the medium in which the guest and the patient becomes one in a trollish festival. The troll is an evil yet divine entity that lurks in alleys to kill people randomly, but given the chance, becomes a supernatural trickster with great power in mythology from the Pacific Ocean to western Eurasia. The red spots are as pure as cotton yet as bright as a peach blossom. In accordance with East Asian mythology, they seem to be an entrance into a different world as well as a world in itself, filled with peach blossoms; they act both as dualistic worlds and as a heterotopology. Ko Hyun-Jung fills a face with these marks in some wrinkled form, as if she is crushing clay with the warm friction of her hands. She fills her hands with heat and transfers the energy into the dance for the troll upon the matrix of those spots. Why does this troll shows off his powers in the modern, immunized world when he is intentionally ignorant of the times?
“From now on, I must call you “roughly-made”. It means you’ve been hastily created by God.” (From Myojin-Jun)
The summoning of the diseases’ prime time before their eradication in order to texturize the innocent woman’s face and to make her name become “roughly-made” is analogous to a persimmon tree coming back from the dead to bloom into new fruit. The troll’s revenge against its perpetrator after coming back from eradication takes the form of madness within the cratered face, causing the perpetrator’s original rage and desire for their lost power to fester and rot deep beneath the surface until it becomes a dark, sticky lump from within. With the passage of time, the lump eventually speaks for itself, and unravels in a flowing, melting fashion; the red spots created hastily by god penetrates through both life and death through its show of power in their collision with mankind. As such, Ko’s drawings of the red spots directly show the power of the guest, and vividly remind us how the time of the diseases infested faces with fiery jealousy, desire, admiration, destruction, humor, purity, and clarity.
Their glances between their flaming marks are unconcerned. They’re carelessly long, casual yet well aligned with fiery, volcanic discomfort. The long eyes seem to originate from a figure in stone carvings, or from the face of dancing and singing gods in Koryo-period wall paintings. They’re ancient, staring my way while not acknowledging anything at all. The careless and casual vision is no longer a metaphysical glance, but rather the sight of right now. The eyes were wrongly descended here, elongating with the expansion of the red spots, they hold the order of time. They steadily rule over the red spots and live among their chaotic riots. Ko Hyun-Jung’s faces remind us of a very familiar aesthetic from traditional Korean folklore, but are unfamiliar with passive acceptance. They can be described as the fantastical nature of resurrection, or perhaps as the supernatural nature of molten metals rising into an explosion.
These pieces are unrelated to the beginnings of modernism; modernism’s both ironic and aesthetical attitude has switched like a metronome, shifting between the warlike stance of avant-garde insertion into the political problems of reality and the prioritization of aesthetics in an effort to find joy in free thought. However, the “May Revolution” of 1968 dissolved the avant-garde practices and guillotined the concept of modernism itself. In addition, the oil shock of 1970 and the chaos of international finance made certain the death of the modernist age. Around the same time, the imagination and fear of love and the end of Evangelical movements led to the explosive thesis from the movie The Night of the Living Dead (released in the same year): “They ought to make the day the time changes the first day of summer”.
The resurrection of modernism was a parody and a satirical stab at the western theory of an unmoving timeframe, so we must ask the question: What is the “first day of summer” that could change the timeframe? It may be the day when we courageously adopt the timeframe of a foreign culture. The acceptance and adoption of the “death drive”, as well as the adoption of a timeframe that completely contradicts such a death drive can be seen in the artworks of Park Saeng-Kwang, Chun Gyung-Jwa, [Pablo] Amaringo, and [Uta Uta] Tjangala. In Ko Hyun-Jung’s artwork, there exists the first day of summer-the moment when the features are defined in the chaotic face, once described as “black holes on a white wall” by Deleuze. Before the features were clearly defined, the faces were mask-like, without any characteristics to show destiny, religious belief, carelessness, dictatorship, naivete-the aspects that were blurred by the condensed potentials of time. Oscar Wilde’s quote, “Man is least himself when he talks in his own person. Give him a mask, and he will tell you the truth”, stems from the fact that such a mask is the icon that encapsulates the collection of “facehood” from the mosaic of time.
Now, look at the 70 faces carefully-they are the truths of this mask, already having passed the death drive hold much potential as a collective body; they care primarily characterized as both dynamic and different. The red spots that constitute the face along with its eyes, nose, mouth, and ears, inspire awe and shape the expression into that of a world separate from the cesium molecular clock of the real world, perhaps due to the power of ambivalence. Depending on the viewer’s constructive mental image, the facial features are once again checked by a completely instinctive “default setting” like that of an infant in a mirror. That is, even a newborn can distinguish between beauty and ugliness. However, these variant and diverse faces aren’t only depending on the purely instinctual artistic perception of a newborn, but also on an infantile recognition of even the vaguest of faces, such as three stones thrown randomly on the ground. The constituents of the faces are already formed by the combination of a primitive and chaotic facial canvas, the desire to escape the theoretical perception of human faces in the white wall/black hole theory, and the infantile level of facial visualization. The human face foretells a grand future of destruction, utilizing the red spots that symbolize negative impulses. This huge unforeseeable future takes place in a completely different timeframe. The “first day of summer” begins its approach within the bounds of both human, yet deeply inhuman faces.
#3. “When I rubbed the empty areas not colored with scarlet, many colors came out. I then used a twig to burn the wound to prevent an infection.” (John Long)
When I awoke from my slumber and approached the window, somebody’s face reflected through the spots in the glass. I recognized that in order to properly see the reflection in the spots, we had to see through the marks of our own glasses. Because of this, we must add some extra color to the reflected face. In our hearts, such additional color can be seen within Hwang’s “The Guest” as spirits that show through glass such as TV screens and windows. The fantastical faces of those long passed can be named as our own ‘guest’. In the past, such a fantasy was Marxism or Christianity, but for us the fantasy manifests in the face of a truck driver when the spirit of a recently passed colleague shows itself upon his features. Ko Hyun-Jung’s faces greet such a fantastical guest through the blooming of the angry red spots, yet the name of the guest remains undecided.
However, when we burn the red spots a bit more, surely something will appear from a certain face, whether it’s something old-fashioned, a hidden instinct from the modern age, or a clear connection. During this burning process, Ko punctured a hole straight through the paper. This hole would normally serve as a sexual symbol in the works of Fontaine or Duchamp, but Ko utilizes the hole to symbolize the fantasy of a developing face. Ko transparently lays out the drawing like a mirror, in which the audience’s minds can tune themselves as they see the spots through their own. Even though the depiction is a face, its identity is within a completely different dimension. Now, the agony seen in the face covered with red spots, praising the “first day of summer” as it spreads out within the body, to different animals and objects. As Rimbaud once said, “Let the moment come / When hearts love as one”. As such, we must be happy that the faces and bodies of a new era app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