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개인전 < The Sweet Sunburn >
서문, 리뷰 글입니다.
목차
리뷰
가장 오래된 빛
임현영 (미술이론)
서문
여름 이상의 형이상학
조재연 (미술비평)
가장 오래된 빛
임현영 (미술이론)
0. “새것과 과거는 낡은 것과 고백처럼 연관된다. 태초의 혼돈은 우리의 내면에서 낡지 않았다. 고백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낡지 않았다.”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0, p.298)
1. 키냐르에게 ‘옛날’은 사라지고 없는 무엇이다. 그에 따르면 존재의 탄생을 기점으로 세계는 ‘옛날’, 그리고 ‘옛날 이후’로, 시간은 ‘옛날’과 옛날 이후인 ‘과거’로 나뉜다.1) 과거에 사는 인류는 옛날을 꿈꾸지만, 그것은 결코 표현될 수 없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들을 부활시키는 방법은 언어뿐이나 어떤 단어도 의미화 사슬의 미끄러짐을 피해 갈 수는 없으므로 이 시도는 다시금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옛날이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오래전의 일이라면, 그래서 말해질 수도, 전체적으로 파악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인류는 옛날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을까.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것들을 결코 복원할 수 없는 것일까.
2. 《The Sweet Sunburn》은 이러한 원초적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흥
미로운 것은 작가가 옛날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키냐르의 저서들이 옛날에 대한 담론적 정의를 시도했다면, 전시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 확장된 사유의 방식으로 옛날을 재조명한다. 작가가 상정하는 옛날은 언어가 주체와 타자를 이분화하지 않은 시점, 폐쇄적인 인간문화가 형성되기 이전의 어느 때이다. 과거 회상의 한 장면 혹은 현실과 비현실이 섞인 꿈과 같은 이미지들은 옛날에 대한 막연하고도 광대한 사유를 창발한다. 꿈은 세계로부터 비롯되며 세계를 향해 작동한다.2) 그 꿈이 재생된 화면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내면으로부터 발생한 자연적 이미지들이다. 그러므로 인류보다 앞서 존재한 꿈을 읽어내는 일은, 그것이 설령 일시적일지라도, 옛날을 섬광처럼 회귀시킨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시간에 관여하는 회화이다. 그것은 언어에 또 다른 몸체를 부여하고, 때론 언어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미지들을 관습, 상징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하여 그 자체로 놓아두고자 한다. 수수께끼 같은 화면에 등장하는 ‘부류’3)들은 인간의 시선이 규정한 고정적 형태에서 벗어난 채로 존재하며, 그 결과 평면은 전체적인 것으로 수렴하기보다 이질적이고 비균질적인 요소들의 총합이자 살아있는 흐름이 된다.
그러던 와중에 뿔뿔이 흩어지고 짐승에게 잡아먹히기도 하며 심지어는 포획해서는 안 될 동족까지 그물에 넣는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행동 패턴이 난무하는 화면 안에서 우리는 폐허와 낙원을 동시본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거주자들이 잡다하게 뒤섞여 서로에게 관여하는 모습은 옛날떠오르게 하는 한편, 한쪽이 다른 한쪽을 대상화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화는 곧 다가올 파멸을 예견하는 듯하다.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구체적인 증거인데, 이들캔버스에 무언가 재현되는 순간 지배적인 주체의 시각성은 자연을 단지 재현 가능한 대으로 환원할 것이다. 인간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그를 물어뜯고 마는 짐승들의 모습은 인역시 외부의 생태에서 볼 때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며, 이로써 고정된 포식자-먹잇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가 옛날과 과거가 혼재된 상황을 보여준다면 < 산갈치 >(2021)는 그보다 더 이전으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이작업에서는 지진이나 쓰나미가 임박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용왕이 보냈고 전해지는 산갈치와 높게 솟은 파도 위로 몸을 던지는 인간에게 시선이 모아진다. 심해가 해안에 나타나는 것이 강진이나 쓰나미의 전조현상이라는 속설은 과연 어디서 비롯것일까. 인간은 자신을 설득히기 위한 노력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다양한 관점을 아우신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물 밖으로 나오는 산갈치가 있는가 하면 물 안으로 잠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상호주관성의 관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둘은 자기들의 생태학에 서식하는 방식들의 전 범위에 걸친 연속의 양극으로,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을 오가는 서사 속에 존재한다.4)
4. ‘The Sweet Sunburn’이라는 제목에서 또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이라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운명의 양가성이다. 태양은 여름 동안 몸 곳곳에 검게 그을린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또 손가락을 뻗어 그 위를 가느다랗게 만지며 물질화된 시간의 차원을 감각한다. 오래도록 햇빛 아래에 있던 어떤 날에는 이 그림자가 경미한 화상 자국이 되기도 한다. 이때 발생하는 붉은 흉터와 그에 수반되는 따끔거림은 단순한 통증을 넘어 일종의 보상이자 증거-내가 여름의 한가운데 있었다는-가 된다. 이는 한편으로 고단하지만, 또 그 고단함으로 인해 아름다운 무수한 자기들(selves)5)의 생을 표상한다. < 어느 더운 날의 오후 >(2021,2022) 연작에서 작가는 땅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그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여름을 나는 존재들을 주시한다. 수평적인 시선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의 범위를 확장한다. 클로즈업된 화면 안에는 그가 여름 내내 조우했던 풍경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붓질의 형태와 속도감 등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식이 본래 작업에서 작가의 존재를 각인하기 위함이라면 < 어느 더운 날의 오후 >에서는 그 반대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잔디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여러 마리의 고양이와 풀숲을 헤집고 뛰어다니는 개구리, 그 위로 죽은 듯 누워있는 새와 반인반충(半人半蟲)의 모습을 한 인간-나비들은 작가의 몸을 통과해 구현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신체는 오히려 뒤로 물러난다. 이로 인해 이들이 처한 상황-투쟁과 평화, 생과 사가 공존하는-은 고스란히 화면에 드러나고, 이때 우리는 여름에 흘리는 땀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결국 작가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인간 존재들을 ‘재현’하는 일이라기보다 이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요소를 포착하고 이를 회화의 언어로 정직하게 풀어내는 일인 것이다.
5. 한편 고현정의 작업에서 , 비인간 존재들은 연약함과 강인함, 순응성과 야성성이 혼
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개념들은 극단에 놓여있지도, 엄격히 분리되지도 않는다. 인간이 동식물에 부여한 특성은 그것들을 통제하기 쉽도록 이상의 영역에 배치한 것에 불과하다. 모든 존재가 인간에게 호의적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기초한 작업은 인간이 만든 임의적 관계가 오만과 착오 위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 새에게 쫓긴 날 1,2,3 >(2021)에서 이러한 관계는 잠시 중단/전복된다. 작업에 등장하는 새 무리는 대상화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역으로 대상화한다. 물까치로 추정되는 이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인간의 머리 위에서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 행위를 지속하는데, 이는 단지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인간이 비인간에 대해 취하는 일방적인 연결고리를 끊어내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6) 이는 바로 옆에 위치한 < 싸움 >(2021)에서 제시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곤충을 잡아 아무렇지 않게 해체하는-과 대비되며 마치 한편의 복수극을 보는 것 같은 통쾌함을 선사한다. 작가는 우리 너머로 확장되는 세계로의 발돋움, 혹은 옛날로의 회귀가 쉽게 성취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과연 인간은 그들로 향하는 원시적인 죽음 충동과 잔인함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가. 해러웨이가 언급한 타자와의 ‘함께-되기(becoming with)’는 존재 방식의 확장을 약속하지만, 이를 위해 ‘인간적’이라는 개념의 재정의를 요구한다.7)
6. 《The Sweet Sunburn》은 각종 미래지향적 이미지가 난무하는 오늘날, 그 시각적 근원을 의심케 하는 ‘옛날’ 이미지로의 복귀를 희망한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예술’,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작가’를 모두 신격화했다. 모두가 이들을 올려다볼 때 고현정의 회화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타임라인을 역행하며 이따금 멈춰 선다.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나서기 전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 별똥별 >(2021)로 기억을 옮겨본다. 우리는 ‘쏟아지는 별들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8)에 대해 이야기했다. 철저하게 망가지고 파괴될지라도 무언가를 따라갈 수 있다는,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행복. 다시 맨 처음의 질문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견된 실패일지 모른다.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영영 불가하고, 우리는 똑같은 시공간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오래도록 기다릴 것이다. 그가 창조해 낸 유예공간에서, 땅에 발을 디디고 선채로. 그리고 운이 좋은 날엔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의 한 부분을, 그것이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빛나는 태양의 흔적을 어느 한편에 새기고서.
1) 파스칼 키냐르(2010), 『옛날에 대하여』,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p.368.
2) 에두아르도 콘(2018),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옮김, p.32.
3) 에두아르도 콘(2018), 앞의 책, p.38.
4) 같은 책, p.242.
5) 같은 책, p.134
6) 조재연(2022), 『여름 이상의 형이상학』, 전시 서문, p.1.
7) D. Haraway(2016), Staying with the Trouble, Duke University Press Books, p.58.
8) 진은영(2003),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 지성사
여름 이상의 형이상학
조재연 (미술 비평)
당신의 말을 잘 듣는 나는 비로소 여름을 당신에게 보낸다. 당신은 당신의 생이 싫다고 했지. 그러니까 내가 그 생을 망가뜨려 줄까.
그가 소리를 지르고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당신의 속이 풀리어 해어질 때까지. 그러다가 결국은 그를 연민하고 말 때까지 생이 저물게 만들어 줄까.
어린 숨결에도 시들고, 젖은 안개에도 불이 붙고, 거위의 깃으로도 곪을 만큼 생을 흐물게 녹이어 줄까. 바다를 증명하려는 조개의 화석처럼, 초생달을
고백하고 마는 고래의 맥놀이처럼, 백 개의 그림자를 알리는 밀의 줄기처럼 굳어지지 않는 것들로 모두 모두어 이곳을 채워줄까.
너에게 아침은 어떻게 오지라고 묻지 않고, 처음으로 밤을 기다릴 당신. 다디단 살 그을음. 아이의 웃는 얼굴엔 희망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수순에 따르면, 미소 동안 경직된 입가는 이내 힘이 기울어 절망을 기다리는 표정이 된다. 무표정엔 미소로 가는 길이 있지만,
미소엔 다시 미소로 갈 여정이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니 나, 도리어 웃는 얼굴마다 비애를 읽고 있다. 하이얀 빗금만큼 빛이 사그라질 것도, 겨우 밤을
머금은 물 역시 번지고 비뚤어져 공백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도, 붓은 시작한 적도 없이 어딘가 도리 없이 도착하고 말았다는 것도 빠짐없이 발설하는
저 자욱 때문에 미소가 도달할 장소를 전부 들켜버리고 만다. 하여 아무리 당신이 웃어도 생을 망가뜨리는 일은 그만두지 않아야지.
도무지 나뭇결을 잇는대도 기절한 새와 손은 서로가 불편하다는 사실쯤은 나는 알고 있다. 여름에 가장 큰 천체처럼 스스로 열을 내는 손바닥이
비록 상냥함을 담았다 하더라도, 거칠고 온도도 없는 나무갗보다 새를 실망시킬 테고, 눈을 뜨지 않는 동안에만 머물고 눈을 뜨면 이름을 부르기 전에
사라질 새는 손을 기어코 서운케 할 것이다. 산갈치는 바란 적 없이 노도에 이끌려 뭍에 올라와 꿈뻑 꿈뻑 너를 노려 응시한다. 여름을 도망치는 동안
종종 당신을 숨겨주었던 바다는 고작 죽음과 닮아있는 것이라며, 그는 바다의 맨얼굴을 말했다. 너울은 사실 피서를 언급한 게 아니라 종말을 발음한 거야.
그러므로 이번엔 계절을 피하러가 아니라, 생을 피하러 바다로 가자. 그가 내일을 길어 올릴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 말고, 어제를 모두 삼켰던 만큼
깊어 내려간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럼 부력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고도 바라던 침몰을 찾을 수 있어. 생을 피하기 위해 잠기는 몸도 한 모금의 해수조차
푸르게 하지 못하다는 것을, 손이 담기기 전에 이미 흘러간 그는 멍들지 않고도 푸르다는 것을 끝까지 기억해내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을까.
어느 더운 날의 오후엔 하루가 오직 징그럽게 끝나도록 벌레와 양서류를 건넬 거야. 그러니 곤충의 얼굴은 요정처럼 오직 기쁨뿐이다. 타닥이는 날갯짓이
흘리는 가루를 삼키기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그 많은 다리가 벽을 차거나 피부를 스치는 소리에 놀라지 못하고 만지게 되도록. 그의 더듬이도 여러 개의
팔도 당신을 위해 문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거야. 재빨리 내보내고 지우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여기 또 있어라고 당신은 말하게 된다.
이때 빛은 평소처럼 희망과 관계 맺기보다, 가로등이 가진 게 하루뿐인 괴이한 존재들을 불러 모으듯 또 당신의 생도 그만큼 짧아질 수 있다며 안심시키듯
오로지 초대하는 데만 쓰일 것이다. 이렇게 눈이 밝은 것들은 그 발톱으로 생을 할퀴곤. 비명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귀여움으로 현혹하고, 울음으로 귀를
막는 데 종사한다. 당신의 죄는 그저 야옹이라며. 한여름의 사랑은 이다지도 당신의 머리를 뜯어내기 위해 종사할 테다. 색출도 취조도 총성도 필요치 않고
하루 종일 졸린 잠으로 마감으로. 새에게 쫓긴 날 그가 쪼아 조각하려 했던 것은 하늘에 대한 금물. 꿈을 포개고, 무지개를 기다리고, 구름 뒤에 맑음을 소망
하는 인생의 금물. 새는 하늘이 다리를 모두 끊어놓았다는 것만을 당신에게 상기시킨다. 별똥별. 돌이 아니라 쏟아지는 별들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행복, 그
전설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어. 인생이란 화마에 놓는 맞불. 그 여름. 태양은 너무 빛날 테다. 어제와 라일락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부디 당신은 껍질만
남은 인간에 이르길. 껍질을 제외하고 모두 탈 때까지 그리고 그 거죽이 모두 눌어붙을 때까지 당신을 도울 테야. 생이 싫다고 했지. 그럼 내가 그 생을 대신
좋아하려 해볼까. 종말을 기다리는 동안 그 시간을 막을 마음은 없어. 대신 종말이 올 때까지 함께 있어주고 말 나. 탄 귀를 만지고,
마른 등을 쓰다듬으며 비로소 여름을 당신에게.